호별보기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하지만, 가을만큼 음악과 잘 어울리는 계절이 있을까.
그렇다면, 독서와 음악을 함께해 보면 어떨까. 이 계절, 음악과 독서를 통해 올해의 반 이상을
힘차게 달려온 나에게 잠깐의 위로를 건네보자
가을의 시작인 9월, 라흐마니노프를 소
개합니다. 라흐마니노프는 엄청난 재능
을 가진 음악가였지만, 잇단 실패와 사
촌과 결혼했다는 이유로 사회적 비난을
받아 우울증을 심하게 겪었습니다. 하지
만, 유명한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내놓
으며, 재기에 성공하고 우울증에 벗어날
수 있었죠. 2번 교향곡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작곡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만들
어진 곡이니 라흐마니노프를 우울에서
구원한 음악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처럼 라흐마니노프의 우울을 치유했듯,
2번 교향곡 3악장은 우리에게 마치 마
법과도 같은 순간을 만들어 줍니다. 현
악기의 첫 선율이 울려 퍼지면, 마치 기
적이란 것이 어딘가에는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이 샘솟고, 3악장 내내 불안감과 외
로움을 포근하게 달래주는 선율이 이어
집니다.
세상에는 많은 비극들이 있습니다. 전
쟁, 가난, 그리고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마음속 슬픔. 우리의 마음에 불안과 외
로움을 불러일으키는 어둠이 존재하죠.
하지만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 3악장
을 듣고 있노라면, 그 어두운 이면 어딘
가에는 기적이 있지 않을까 기대하게 됩
니다. 누군가는 이 음악을 들으면 종교
와 상관없이 천국을 잠시 마주하고 온
기분이라고 하니까요.
3악장을 다 듣고 나면, 저는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가 생각납니다. 사랑이란
감정에 휘둘리다 인생의 파국으로 치닫
는 안나의 모습을 생각할 수도 있겠지
만, 그보다는 이 소설을 해석한 박웅현
선생님의 표현이 더더욱 떠 오릅니다. 모
든 인생은 가지 않은 길이며, 아무리 오
래 살아도 처음 닥쳤을 때 자신의 감정
은 알 수 없다는 것. 하지만 이 책을 읽
고 나면 최소한 ‘마음의 길’을 잃지는 않
는다는 것. 살면서 만나게 되는 불안, 외
로움, 사랑, 질투와 같은 감정을 세밀하
게 표시한 지도처럼 정확하게 보여줄 것
이기에, 처음 마주해서 당황하며 마음
의 길을 잃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죠. 박
웅현 선생님의 불안과 외로움을 달래는
‘감정 지표’가 안나 카레니나였다면, 저
의 마음을 달래는 ‘감정 지표’는 라흐마
니노프 교향곡 2번 3악장이라고 할 것
같습니다.
우리의 불안과 외로움을 없애는 ‘감정 지
표’와 함께 기적의 순간을 느껴보시길 추
천합니다. 어두운 감정을 이겨내고 ‘마음
의 길’을 잃지 않은 채 삶을 힘차게 이어
갈 에너지를 얻을 수 있을 테니까요.
드디어 가을입니다. 재즈는 언제 들어도 좋지만 역시 가을이
가장 제격이지요. 이번에는 무라카미 하루키와 재즈를 함께
얘기해 보려고 합니다. 일본의 가장 유명한 작가인 무라카미
하루키는 재즈 애호가로도 유명하죠. 하루키는 7년간 재즈 카
페를 운영할 정도로 많은 애정을 가지고 있는데요. 그의 거의
모든 작품에는 재즈 음악이 최소한 한 두 곡씩은 수록될 정도
로 하루키와 재즈는 떼놓을 수 없는 관계라고 할 수 있겠습니
다. 그중 가장 인상 깊은 부분은 소설 <1Q84> 서문에 나온
It’s only a paper moon인데요. 1932년 만들어진 음악으로 냇
킹 콜을 비롯해 엘라 피츠제럴드, 프랭크 시나트라 등 유명 뮤
지션들이 레코딩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 어떤 환상
과 거짓도 사랑하는 사람이 믿어준다면 현실이 될 수 있는 세
계를 노래하는데요. 무라카미 하루키 특유의 환상과 현실을
오가는 스토리와 절묘하게 맞아 들어갑니다. 책을 읽으며 마
음이 설레기까지 했다고 하면 조금 과장이겠지만, 정말 잘 만
든 영화 소개 영상보다도 저에게는 더 흥미로운 자극을 주었
던 것 같습니다.
6개월 이상 재즈를 소개하면서 가장 자주 인용했던 단어들
은, ‘자유’, ‘일상’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자주 접하기 힘든 재즈
를 편하게 들어보시라는 이유로 인용하기도 했지만, 사실은
바쁘게 사는 사회 속에서 정말 가지기 힘든 것들이 ‘자유’와
‘일상’이 아닐까 싶어서, 일부러라도 그런 것들을 더 누려보셨
으면 하는 마음이기도 했습니다. 이번에 하루키와 재즈를 소
개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루키의 “‘자유로워지다’라
는 것은 설령 그것이 잠깐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더라
도 역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멋진 것이다”라는 말처럼, 음
악과 잘 만들어진 소설 한 권을 자유롭게 즐긴다면 잠시나마
고단한 현실을 벗어나 멋진 환상 속으로 도피할 수도 있지 않
을까요.
그 어떤 눅눅한 감정도 녹일 것 같은 달콤한 냇 킹 콜 버전의
‘It’s only paper moon’과 함께, 비단 독서가 아니더라도 즐거
운 상상이 가능한 경험을 즐겨보시는 걸 추천합니다. 우리 모
두 오늘만큼은 현실을 열심히 살기보다는 나의 즐거운 상상
속의 삶을 누릴 자격이 충분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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