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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샐러드
“유길준, 한국의 근대를 그리다”

2020-01-23

글. 최덕수(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명예교수)

 

“유길준, 한국의 근대를 그리다”

 


19세기 후반 한반도에 불어 닥친 시대적 과제 앞에서

1866년 가을이 깊어갈 즈음, 10세 소년 유길준과 가족들은 서울 중구 계동을 떠나 그의 친척들이 살고 있었던 광주군 동부면 덕풍리(지금의 하남시 덕풍동)로 향하고 있었다. 기계 유씨 동족 마을 덕풍리를 향하던 이유는 그해 9월 26일 한강의 양화나루에 출현한 두 척의 이양선 때문이었다. 프랑스 군함이었다. 그해 봄 가톨릭 신부 살해(병인박해)에 대한 보복으로 추진되던 한국 침공(병인양요)을 위한 사전 정찰이 목적이었다. 이보다 20여일 전에는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의 양각도에 상륙하여 노략질을 일삼던 이양선이 군민의 화공으로 침몰하였다. 미국 선적의 제네럴셔먼호였다. 1866년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기, 평양과 서울에 모습을 드러낸 서양 세력의 무력 침공은 많은 한국인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새롭게 시작된 서양의 위협 앞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 것 인가?’ 유길준은 10세 때 프랑스의 침공으로 벌어진 병인양요, 20세에 일본과의 강화도조약, 30세에는 영국에 의한 거문도점령사건, 40세 무렵 동학농민봉기를 계기로 벌어진 청일전쟁, 50세 전후 러시아와 일본의 대결 국면에서 벌어진 러일전쟁을 겪었다. 그가 살았던 19세기 후반 한반도는 거대 무기를 앞세운 강대국의 개방 요구 앞에 국가의 자주와 자립을 지키기 위한 개혁이 무엇보다 절실한 때였다. 그는 당대 한국이 해결해야 할 시대적 과제와 정면 으로 대결하며 해결책을 모색해 나아갔다.

 

일본·미국에서 유학한 최초의 한국인, 「서유견문」 집필 시작
유길준의 생애와 사상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하남 덕풍동으로 피난을 내려왔던 유길준은 서당에서 「소학」 「자치통감」 등을 읽었는데, 뛰어난 문재를 발휘하여 지역에 이름을 드날렸다. 서울로 돌아온 후 1870년 개화파의 거두인 박규수 문하에서 김옥균·박영효·서광범 등과 함께 중국에서 유입된 서양 문물을 소개한 「해국도지」 같은 서적을 읽으며 학습하였다. 1881년 한국 정부가 일본에 파견한 유학생으로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가 설립한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서 근대적 학문을 수학하였다. 1883년 1월 귀국 후 「한성순보」 발간 실무를 맡았다가, 7월 미국사절단 수행원으로 미국에 건너가 일본에 이어 미국에서 유학 생활을 작하였다. 이로써 유길준은 일본·미국에서 유학한 최초의 한국인이 되었다. 생물학자 에드워드 모스(Edward S. Morse)의 지도와 후원을 받아 메사추세츠 주 바이필드에 위치한 덤머 아카데미(Governer Dummer Academy)에서 1년 반가량 수학하며 하버드 학교 진학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고국에서 갑신정변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유길준은 더 이상 유학 생활을 진행하기 어려우리라 판단하여 귀국하기로 결심했다. 미국에서 출발한 그는 대서양을 건너 영국을 거쳐 유럽 각국을 둘러본 후 조선으로 돌아왔다. 인천에 도착한 것은 1885년 12월 21일이었다. 귀국 직후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파의 일원으로 간주돼 체포되었으나, 정부가 그의 선진학문을 높이 평가하였기 때문에 연금 상태에서도 「서유견문」을 집필할 수 있었다.

 

「서유견문」등 많은 저서에서 한국의 근대적 개혁론 주장

유길준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답게 많은 저술을 남겼다. 유길준을 대표하는 한 권을 꼽는다면 「서유견문」을 들 수 있다. 1880년대중반부터 집필하기 시작하여 1895년 도쿄에서 출간된 이 책은 단순히 서양을 소개하는 범위를 넘어, 한국의 근대적 개혁을 위해 서구제도 중 적용 가능한 것을 탐구한 것이었다. 유길준은 「서유견문」을 통해 서양의 정치·경제·사회 제도를 소개하며, 18세기 유럽이 그러했듯이 왕조 국가라는 현실적인 정치 구조 하에서 실현 가능한 개혁을 추구하였다. 「서유견문」을 비롯하여 여러 글에서 재정·국채·지세·화폐·회사 등의 개혁론을 주장하였다.

 

유길준의 ‘근대 국가’ 사상, 정부 주도 개혁 정책의 이념적 기반
유길준은 1892년 연금에서 풀려났으며, 2년 후 개혁이 추진되면서 다시 관직으로 복귀했다. 1894년 한국 정부의 개혁 정책(갑오개혁)은 전통국가를 근대국가로 변화시키려는 시도가 집중되었던 정부 주도 근대화 프로젝트였다. 유학 시절 습득한 근대 학문을 통해 형성되었던 유길준의 ‘근대 국가’ 사상은 개혁정책의 이념적 기반이 되었다. 1894년 갑오개혁 내각이 성립되자 유길준은 군국기무처 회의원이 되어 활약하였다. 그해 10월에는 한국사절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건너가 총리대신, 외무대신 등과 빈번하게 접촉하면서 고문관 초빙과 같은 현안을 논의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내부협판을 지내며 지방제도개혁을 적극 추진하였고 이후 내부대신에 오른 후 단발령을 강행하며 강한 개화의 의지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유생들의 반발이 의병으로 나타났고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자(아관파천), 유길준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52세 유길준, 나라를 지키기 위해 계몽운동 활발히 전개
1907년 8월, 유길준은 11년 6개월의 긴 망명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였다. 일본이 헤이그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했다는 트집을 잡아 고종을 강제로 폐위시킨 시점이었다. 귀국 직후 그는 궁내부 특진관에 임명되었으나 상소문을 올리고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후 흥사단을 비롯해 계산학교, 융희학교, 은로학교, 노동야학회 을 설립하며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1월에 설립된 흥사단의 목적은 ‘모든 국민을 선비로 만든다’는 것이었다. 흥사단은 국민 모두를 위한 보통교육을 보급하기 위하여 구체적인 사업을 제시하고 실천하였다. 신식 학교 교육에 필요했던 교과서를 편찬·간행하고 교사 양성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고 지원하였다. 길준은 일본 망명 기간 조선이 폴란드처럼 망할 수 있다는 위기감에서 「폴란드쇠망사」를 번역한 바 있었다. 1908년에는 부국강병에 성공한 모범을 찾기 위해 「프러시아 프리드리히 대왕 7년 전사」도 번역하여 간행하였다. 이 외에도 서구의 정치이론, 정치형태 등을 소개하고 있는 정치학 개설서인 「정치학」과 「크리미아 전 쟁사」, 「이탈리아 독립전사」 등을 번역·출간하였다. 아울러 한국어 문법을 정리한 「대한문전」, 야학회에서 학습하는 농민·노동자들을 위해 순 한글로 집필한 「노동야학독본」 등의 계몽서도 저술하였다. 한편으로는 한성부민회에서도 회장직을 맡은 동시에 국민경제회, 호남철도회사 등을 설립하여 경제 활동도 병행하였다.

 

‘해방 75년’을 맞이하는 오늘, 유길준의 삶에서 역사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다
1910년 8월 일본은 한국을 병탄하였다. 조선총독부에서는 남작 작위를 수여하며 회유하였으나, 유길준은 이를 거부하고 반환하였다. 1914년 9월 30일, 유길준은 평소 지병이었던 신장병이 악화되어 생을 마감하였다. 유언에 따라 광주부 동부면 덕풍동(현 하남시 덕풍동)에 안치되었다(이후 도시개발로 인하여 하남시 창우동 검단산으로 이장). 유길준은 외세의 위협으로 인하여 한국이 존망의 위기에 처한 시기, 국가의 자주와 독립을 지키기 위한 방안을 제시하고 실천했던 사상가이며 정치가였다. 또한 생애 후반부에는 계몽운동과 사회운동에 진력한 인물이었다. ‘병합 110년’과 ‘해방 75년’을 맞이하는 2020년 오늘, 유길준의 삶을 되돌아보며 역사의 의미를 생각해본다.

2020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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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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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2024.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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